수더분한 스토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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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학교에서 3일 정도 지났을 즈음이었다. 한 동기생이 누군가로부터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면서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내용인즉슨, 우선 배속을 받아 벌써 자대 생활을 시작했던 한 동기생으로부터 '배속 계획'을 입수했다는 것이었다. 배속 계획은 특기별로 어느 부대에 자리가 나는지, 또 몇 자리가 나게 되는지의 내용이 포함된 문서였다.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서 내용을 확인했다. 수도권에 살고 있던 나로서는 수도권 외 지역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내용을 보고 내 머릿속에 남아 있던 건 '수원 3자리, 성남 1자리, 오산 7자리'밖에 없었다.

계획문서대로라면 30명도 안 되는 우리 인원들 중에서 3분의 1도 넘는 인원이 수도권에 갈 수 있게 된다. 게다가 2등이란 성적을 보유한 나로서는 '못해도 오산은 갈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우리를 소집한 형은 학과장 화이트보드에 배속지를 일일이 받아 쓰면서 회의를 진행했다. 그 형이 이야기했다.

"우리가 장교대에서도 피 터지게 공부했는데, 여기서까지 이렇게 해야 쓰겠습니까. 배속 계획도 나쁘지 않은데 그냥 우리 맘 편하게 ‘쇼부’ 봅시다."

쇼부란 배속지 선정 과정 속에서 이뤄지는 '합의'를 뜻하는 말이다. 즉, 각자의 형편에 맞춰서 최대한 배속지가 겹치지 않도록 조정해보자는 뜻이었다. 적절한 설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형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자고 주장했다.

자기 성적이 꼴찌였으니 합의가 절실할 수밖에.

그런데 그 형의 '합의 계획'은 생각보다 큰 호응을 얻었다. 지방 출신 동기생들은 각자의 고향에서 가까운 배속지를 나눠 고르기로 했고, 수도권 출신 동기생들은 성적순으로 원하는 지역을 골라보기로 했다. 문제는 역시 '수도권'이었다. 수도권 쟁탈전은 생각보다 치열했다. 특히 수원 거주자와 성남 거주자가 각각 3명이나 있던 탓에 두 지역 분쟁이 심각했고, 오산은 워낙 근무강도가 높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다들 기피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분위기가 고조되며

소란스러워지던 타이밍에 '과정장'이 들어왔다.

'너희 뭐하는 짓이야. 다 엎드려!’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교관들에게는 철저하게 비밀로 했어야 하는 건데, 모두 들통나버렸으니.

이날부터 우리를 대하는 교관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무서운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3일 만에 알게 되었다.

학과장에서는 철저히 비밀로 했지만, 숙소에 돌아와서는 종종 '합의'얘기를 다시 꺼내곤 했다. 물론 나는 그들을 100% 신뢰하지 않는다. 누구 하나 뒤통수쳐도 되돌릴 방법은 없으니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열심히 공부해서 '우선권'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합의를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배속지를 선택할 수 있으니깐.

혹 '동기들인데 왜 못 믿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권모술수로 가득한 전쟁터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패배한 자는 3년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다.

https://brunch.co.kr/@stophun/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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