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더분한 스토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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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이야기했듯이 정보학교에서는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된다. 그중 우리가 이해를 통해 학습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보면 된다. 구체적인 수치를 암기하고, 지도상의 위치를 기계처럼 외워야지만 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마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이 된 기분이랄까.

EPL로 예를 들어본다면, 먼저 20개 팀의 이름을 모두 다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20개 팀의 연고지를 알고 심지어 지도상에 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여기까지는 애교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TOP4에 해당하는 강호 4팀과 그 팀에 속하는 주전 선수들을 다 외우고, 선수들의 스펙(키, 몸무게 등)을 모두 외워야 한다. 어느 발을 주발로 사용하는 선수인지, 주특기는 무엇인지를 모조리 다 암기해야 한다. 대상이 EPL이 아니라 적 공군이라는 것만 빼면 맥락 상 크게 다르지 않다.

설명에 MSG가 조금 들어갔을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EPL을 외우는 편이 훨씬 재미있고 수월했을 거다. 살면서 북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라곤 '핵', '미사일', '3대 세습'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도 북한 공군의 조직이나 비행사단 위치, 보유 항공기 종류 및 대수, 특징 등을 세세하게 외워야 한다. 매일 새벽 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하다 보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처음에는 '배속지'를 위해서 모두 열의를 갖고 덤벼들지만, 며칠 지나고 나면 '난 관둘래'라며 포기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된다. 물론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는 학과장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학과장 책상에 엎드려 자습 시간이 종료될 때까지 숙면을 청한다. '아, 나도 그만 포기할까'라는 끊임없는 유혹과 시련을 이겨내야만 좋은 배속지를 쟁취해낼 수 있다. 나는 곧 죽어도 '수원'에 가야겠다는 그 일념 하나로 모든 유혹을 끊어낼 수 있었다.

첫 시험을 보고 나서 '이 시험은 절대로 만점자가 나올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시험이 오픈북 평가로 이뤄진다 해도 제시간에 모든 답을 적을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험을 치르고 결과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배속지고 나발이고 그냥 주말에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청주에 아무런 연고도 없을뿐더러 시내 구경은커녕 정보학교에 남아서 주말 내내 나머지 공부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과정장은 집에 갈 수 있는 사람과, 남아야 하는 사람을 나누어 호명했다. 그가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들의 표정에서 희비가 극명하게 갈렸다. 나는 정말 지독하게 공부한 덕에 집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지독한 짓을 3주나 더 해야 한다니, 집에 가는 발길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집에서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보학교에서의 일주일은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는데, 주말 이틀은 왜 이리도 야속하게 빨리 지나가는지. 정보학교에서의 한 주를 겪고 나니, 청주로 내려가는 발걸음이 더더욱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기숙학원에 가는 수험생의 마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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