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더분한 스토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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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소대 방원들과 정신없이 이별을 고하고 정식 소대원들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4인 1실로 사용하는 방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새롭게 만난 방원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나와 두 친구는 스물네 살 동갑이었고,

한 친구만 스물세 살로 동생이었다.

막내였던 그 친구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입대할 수 있었다.

동갑내기 두 친구 중 한 명은 중국 북경대를 즐업한 친구였으며,

한 명은 조종장학생으로 입대한 친구였다.

후보생들끼리 절대로 형, 동생 또는 친구로 지내지 말라는

장교대 지침이 있었기 때문에 첫날부터 말을 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모두 또래였음에도 불구하고 ‘OOO 후보생’과 같은 어색한 호칭을 유지했다.

 

사실 서로 수다를 떨 여유도 없었다.

방문을 나서면 땅바닥만 쳐다보기 바빴고,

방에 들어오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또래 친구들과 같이 고된 동기부여를 받다 보니 외롭지는 않았다.

외로움보단 소외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는데,

나를 제외한 세 친구 모두 체력이 너무 뛰어나서

웬만한 기합에는 힘들어하지도 않을 때 소외감을 느꼈다.

나는 늘 죽을 상을 하고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데,

세 친구는 모든 동기부여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 내며 여유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는데, 4주 뒤에 방을 바꾸고 알게 되었다.

내가 체력이 약한 게 아니라,

그들이 지나치게 강했다는 사실을.

자랑을 한 번 해보자면 나는 훈련을 받는 3개월 동안 단 한 번의 수진(의료 진료)도 받지 않았다.

특별 내무 기간 중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그 날은 특내 첫 번째 날이었다.

하루 종일 기합을 받다가 기진맥진한 상태로 방에 들어와 잠을 청하려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점호장 집합 방송이 울렸고,

점호장에 모여서 또다시 영문도 모른 채 엎드려뻗쳐와 버피테스트를 무한반복하게 되었다.

바로 그때,

‘손바닥에 멍이 든 건가?’ 하는 기분 나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두침침한 심야 시간대라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수십 분의 동기부여가 끝나고 방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손바닥에 돌멩이가 박힌 채로 피가 흥건해져 있다는 사실을.

방에 들어와서 동기들의 도움을 받아 어찌어찌 돌멩이는 빼낼 수 있었다.

그런데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때마침 방송으로 ‘자진 귀가를 원하거나 응급 치료가 필요한 후보생은 내려올 것’이라는 멘트가 울렸다.

나는 괜히 또 내려갔다가 혼나지는 않을지 염려되어 내려가는 것을 꺼렸다.

응급 치료는 말 그대로 응급 처치가 필요한 만큼

큰 부상일 때만 와서 받으라고 이야기했던 소대장의 말이 뇌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더욱 주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방 친구들이 ‘이 정도 출혈이면 상태가 심각하니깐 이해해줄 거야.’ 라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게다가 이 상태로는 당장 내일을 버틸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고민 끝에 응급 진료를 받으러 내려갔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매정했다.

'너는 사회에서 고작 이런 거로도 응급실 가고 그러냐?’며 나에게 윽박지르는 의무 소대장이었다.

애초에 태어나서 이렇게 피가 나분 적도 없는 것 같은데 그

렇게 나를 꾸짖으면서 ‘마데카솔'을 발라주고 '대일 밴드’를 몇 개 챙겨주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 같았지만, 그래도 내게 필요했던 최소한의 의약품을 챙겨주었다.

마데카솔과 대일 밴드 몇 개로 치유될 상처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별 다른 수가 없었다.

대일 밴드를 붙이고 방에 돌아가는데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왜 사람들이 아플 때 가족 생각부터 난다고 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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