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더분한 스토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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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과연 적응의 동물이다.

일주일 정도 되니 몸도 마음도 어느샌가 장교대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스팔트 바닥에 엎드리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는데,

이제는 손바닥에 굳은 살도 박히고 몸에 근육도 잡히면서

웬만한 동기부여는 거뜬히 받아낼 수 있게 되었다. 또

한 이제 더 이상 ‘내가 왜 혼나야지?’라는 철없는 생각 따윈 하지 않는다.

난 임관하기 직전까지는 장교대에 수감한 죄수일 뿐이다.

마음을 그렇게 먹고 나니, 혼나더라도 크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도 '5분 전 대기’는 여전히 불가능하다.

그건 인간이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다.

그래서 그냥 집합 시간이 되면 모든 걸 체념하고 엎드리기로 했다.

내일은 처음으로 종교 참석이 있는 날이다.

모든 후보생들이 다 종교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장교대를 탈출하기 위해서 이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내일이면 새 전투복을 입고 잠시나마 장교대를 벗어날 수 있다.

기대에 부푼 상태로 잠에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방송이 울렸다.

내일 종교 참석을 원하는 후보생들은 전투모, 전투복에 계급장을 부착할 것.

못한 인원들은 장교대에 남을 것. 이상’

젠장 지금 시간이 21:50인데, 22:00면 완전 소등이고 어떡하지.

사회에서 바느질도 거의 안 해봤는데,

하물며 완전 소등 상태에서 바느질을 했다간

계급장을 내 손가락에 꿰매버릴지도 모른다.

갑자기 저런 식으로 통보해버리면 어떡하나

야속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 곳은 항상 이런 식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약속 시간인 22:00에 완전 소등을 하고,

손목시계 LIGHT 기능과 말빛을 불빛 삼아 바느질을 해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하는 수 없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바느질을 하기로 했다.

"삐빅. 삐빅" 현재 시각 04:30이었다.

우리 4명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일어나서 바느질을 시작했다.

다행히 조종장학생 친구가 바느질에 일가견이 있어 그 친구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그 친구가 없었더라면 우리 셋 중 누구도 종교 참석을 할 수 없었을 거다.

우리 방 인원들은 얼추 바느질을 마치고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종교 참석 희망하는 후보생은 지금 즉시 점호장으로 내려올 것. 3분 준다.’라는 멘트의 방송이 울렸다.

송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른 뛰어내려가려고 하는데,

행동이 다소 늦었던 우리 방 막내가 군화 끈을 못 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버리고 갈까’하는 생각부터 들었지만,

그 친구에게도 종교 참석은 간절할 거란 생각에 다시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친구를 의자에 앉혀 왼쪽 군화 끈은 내가 매 주고,

오른쪽 군화 끈은 북경대 친구가 매주 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하마터면 우리 모두가 못 갈 수도 있을 뻔한 상황에서

그 친구를 버리지 않고 챙기고 갔다는 게 대단하지 않은가.

물론 공감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이렇게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교회에 갈 수 있었다.

교회는 사회와 우리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창구였다

‘어제 무한도전에서는....’

‘어제 롤챔스에서....’

사회 소식을 들으니 장교대에서의 일들이 꿈만 같았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장교대로 복귀하기 5분 전에는 짧은 영상을 하나 보여주었다.

'라디오스타’ 예능에 출연한 배우 김기두 씨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오열하는 장면을 틀어주었는데,

대부분의 후보생들이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5분이 지나고, 이제는 꿈에서 깨어 다시금 현실로 복귀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종교 참석 시간은 양날의 검과 같았다. 절망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지만, 그 꿈에서 깨면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거면 애초에 꿈을 꾸지 않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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