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더분한 스토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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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야.’ 과연 그럴까? 화생방 훈련을 하면서도 그럴 수 있을까?

그날은 3주 차 훈련을 마무리하는 금요일이었다. 공군 학사장교가 되기 위한 훈련들 가운데 가장 악명 높은 3대 훈련들 중 하나인 '화생방 훈련’ 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날이었다. '유격 훈련', '행군 훈련', '화생방 훈련' 세 가지 훈련이 기본 군사훈련단 TOP3 영광에 빛나는 훈련들인데, 후보생들마다 느끼는 강도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겠지만, 화생방을 넘버원으로 꼽는 후보생들이 적지 않았다.

'전 후보생은 총기를 포함한 단독군장으로 집합할 것.’ 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집합을 완료했지만 '5분 전 대기'를 못했다는 죄목으로 한바탕 동기부여가 진행되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이제 출발하나?' 싶었는데, 이번엔 인원 파악에서 문제가 생겼다.

'0중대 0소대 총원 00명, 결원 00명, 현재원 00명, 결원 사유 : 외진 0명, 청원 휴가 0명, 이상 보고 끝!' 중대 근무 후보생이 소대 근무 후보생들의 인원 보고를 종합하여 대대 근무 후보생에게 보고했고, 대대 근무 후보생은 장교대 당직사관에게 인원 종합보고를 했다. 바로 그때, 저 멀리서 한 후보생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당직사관은 다급하게 뛰어오는 후보생을 발견하곤 이내 눈빛이 돌변했다. '다 엎드려! 인원 파악은 기본 중의 기본이야. 내려가!’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배탈이 난 후보생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 제때 나오지 못했었고, 소대 근무 후보생은 그 인원이 집합해있는 것으로 보고를 했던 것이다. 하마터면 그 후보생을 두고 화생방 종합훈련장(이하 화훈장)으로 이동할 뻔했으니, 내가 생각해도 우리가 잘못하긴 했었다. 그렇게 앞선 동기부여보다 2배는 더 긴 동기부여가 진행되었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드디어 화훈장으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화훈장으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하다. 모든 학과 이동 간에는 뜀걸음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데 화훈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약 1.5KM가 조금 넘는 거리지만 사실 거리보다는 살인적인 경사도가 문제였다. 화훈장에 가는 길 중간에는 이른바 '껄떡 고개’라고 불리는 죽음의 고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경사도가 15도가 넘어간다. 그 구간을 넘어감과 동시에 우리의 숨도 함께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이름이 '껄떡 고개'이다. 숨이 껄떡한다고 해서. 이 구간을 뛰어간다고 생각해봐라. 그것도 총기를 든 단독군장 상태로. 허벅지와 종아리가 찢어질 듯하고, 까딱하면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심지어 이 구간에서 낙오 인원이 많이 생기거나 대열이 엉망이 되면 다시 장교대로 '리턴'을 시킨다. 아 참, 이동 간에는 '군가'를 목이 터져라 불러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간신히 한 고개, 한 고개 올라가다 보면 마침내 화훈장 입구가 보인다. 문제는 화훈장 입구까지 구간의 경사도는 20도가 넘어간다는 것. 그야말로 헬게이트가 열리게 된다.

그렇게 녹초가 되어 화훈장에 도착하고, 이제 숨 좀 돌리나 싶을 때 화생방 교관이 나타나서 '너희는 정신상태부터 글러먹었다'며 다시금 한바탕 동기부여를 진행한다. 이쯤 되면 '나는 폐활량이 좋으니깐 가스 체험실에서도 숨만 참으면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을 줄 믿는다. 그렇게 반죽음 상태로 가스 체험실에 입장한다. 그것도 '맨 얼굴로.'

'본 교관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절대 방독면을 쓰지 않...' 교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방독면을 써버렸다. '후보생은 얼른 방독면 벗을 것.’ 교관의 지시에도 못 알아들은 것인지, 알지만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요지부동이었다. 교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저 후보생이 방독면을 벗을 때까지 너네는 꼼짝 못 할 줄 알아라.' 젠장. 말 잘 들은 후보생들만 죽을 맛이다. 그렇게 10초 정도 지났을 때 그 후보생은 마침내 방독면을 벗었고, 나머지 후보생들은 이미 지옥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숨을 참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눈과 코 그리고 피부 속 깊이 라면수프를 뿌린 듯한 기분이 들었고, 폐부 속 깊은 곳에서 밤송이가 댄스파티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야 어떻게 되든 교관은 다시 느긋하게 '군가제창'을 지시했다. 누구는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데 혼자서 방독면 쓴 채로 잔뜩 여유를 부리고 있다. 그렇게 그는 우리가 운명하기 직전에 방독면을 쓰게 해 줬다. 맑은 공기가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이제 나가나 싶을 즈음에 심술궂은 교관이 '정화통 교체'를 지시한다. 단, 조건은 자신의 것이 아닌 옆 사람 정화통을 교체해줄 것. 나는 재빠르게 옆 사람의 정화통을 교체해주고, 그 사람이 내 정화통을 교체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양 옆 어느 누구도 내 정화통을 갈아주지 않는 것 아닌가. 다시 코에 라면수프를 한 통 털어 넣는 와중에 누군가 내게 구원의 손길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가스 체험실에서의 '5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30분'은 족히 되었을 줄 알았는데, 교관이 5분이었다고 한다. 죽음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우리는 얼굴에 물을 뿌리고 PT체조로 가스를 날리고서야 왜 방독면 착용이 중요한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냥 말로 설명해주면 되지, 기어코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경험주의 교육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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