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더분한 스토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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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임관 종합평가 중 하나인 응급처치(심폐소생술) 시간이 있는 날이다. 임관 종합평가란,

공군 학사장교로 임관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관문이다. 즉, 일정 자격 기준을 통과해야만 간부로 임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평가 항목은 크게 공통 과목, 기본 전투 능력, 전투 지휘 능력 세 가지로 나뉜다. 공통 과목에는 체력검정, 제식, 정훈, 기본 전투 능력으로는 사격, 화생방, 응급처치, 마지막 전투 지휘 능력으로는 지휘법과 기지방호 과목이 있다.

무릇 모든 일에는 이론과 실습의 괴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응급처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분명 이론적으로는 완벽하게 학습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습 때는 젬병이었다.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듯 실전 경험이 없다면 이론은 무용지물일 뿐이다. 그렇게 임관 종합평가 이전 연습을 할 때에도 생각대로 잘 되지 않고, 실습대상이 되어주었던 '애니’의 가슴이 잘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 또한 흉부 압박을 하는 손꿈치도 금방 피로해져 압박을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본격적인 평가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평가 때는 가슴도 잘 부풀어 올랐고, 흉부 압박도 잘 수행해냈다. 평가 후, ‘적어도 과락은 아니겠구나.’하고 안심할 수 있었다. 교관이 과락자가 몇 명 발생했다고 이야기해서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 얘기는 아닐 거라고 자신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오늘 오후 즈음이면 어제 응급처치 평가 결과가 나오게 된다. 또한 오전에는 도수체조/제식 평가가 있다. 계속된 평가가 이어질수록 따라가기 조금 벅차다는 생각이 든다. 도수체조와 제식 평가는 구분동작으로 이뤄졌고, 나를 포함한 5명이 1조로 구성되었다. 5명이 동시에 같은 동작을 실시하기 때문에 틀린 사람을 한눈에 색출해낼 수 있었다. 나는 제식은 조금 서툴렀지만 도수체조는 나름대로 선방한 것 같았다.

평가를 마치고 생활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어제 실시한 응급처치 결과가 방송으로 울려 퍼졌다. ‘0중대 0소대, OOO, OOO’ 과락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고 재평가를 실시해야 한다는 사실에 순간적으로 멘붕이 왔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 소대에는 3명의 과락자가 있었고, 전 후보생들 중 27명이 과락을 했다. 그래도 나는 이내 ‘그래, 다음 재평가 때 잘하자’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문제는 소대 동기들이었다. 마치 작별을 고하러 온 듯이 내 방으로 와서 하나같이 위로의 말들을 건네주었다. ‘어떡해..', '임관은 할 수 있을 거야', 간신히 괜찮아졌었는데, 그들의 위로 때문인지 갑자기 우울해졌다.

그날 밤, 누군가 우리 방에 찾아왔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OO야, 네가 과락인 게 말이 돼? 걱정하지 마, 너 가면 형도 갈 거야 집에.’ 그리고는 내 입에 로아커 초콜릿 한 뭉텅이를 넣어주었다. 이곳에서 나온 '증식(간식)’이었는데, 아끼고 아껴왔던 그 소중한 초콜릿을 내 입에 넣어주었다. 날 위로해주기 위해서.

물론 내가 집에 간다고 하더라도 그 형이 날 따라서 집에 갔을 리는 없을 거다. 연령제한에 꽉 찬 상태로 입대한 만 27세로, 이제 집에 가면 다시는 장교로 올 수도 없으면서 그런 형의 그 말 한마디가 나에게 너무나 큰 힘이 되었다. 그 형이 없었다면 내가 과연 임관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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