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더분한 스토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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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젠장.’

평소였다면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을 거다.

비가 온다는 건 야외에서 진행되는 학과들이 실내학과로 변경된다는 걸 의미하니깐.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왜냐하면 오늘부터는 3박 4일에 걸친 ‘유격훈련’이 진행된다.

그리고 장교대에는 든든한 ‘전천후 훈련장’이 있어서

폭우가 온다 해도 훈련은 정상적으로 진행될 게 뻔했다.

 

앞으로 4일 동안 내 이름은 없다.

나는 그저 000번 보라매로서 존재할 뿐이다.

‘유. 격. 유. 격. 유격대! 유격대!’

유격 뜀걸음은 상당히 독특하다.

무릎이 최대한 자신의 가슴까지 올라오도록 뛰어야 한다.

유격 기간 동안에는 매일 아침마다 유격 뜀걸음으로 연병장을 돈다.

정확히 몇 바퀴인지는 셀 수도 없다. 그냥 앞사람이 멈출 때까지 뛴다.

문제는 소대장들이 매의 눈으로 보라매들을 살피고 있고,

유격 뜀걸음 자세를 제대로 취하지 못하거나

유격 구호를 작게 하는 보라매들은 얄짤없이 밖으로 열외 하게 된다.

‘열외’를 하니 좋겠다고? 천만의 말씀.

열외 된 보라매들은 16가지 유격체조를 원 없이 하게 된다.

게다가 혹시라도 16가지 유격체조를 제대로 외우지 못한 보라매들은

체조의 강도가 점점 더 높아지게 된다.

우리에게 유격체조를 외울 수 있는 시간은 유격 전 주말 이틀 정도밖에 없다.

따라서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동안에 16가지 유격체조를 완벽하게 숙지해야 한다.

물론 자신이 없는 사람은 그냥 몸으로 혼나면서 배우면 된다. 몸이 남아나질 않겠지만.

 

한바탕 유격 뜀걸음이 끝나면 본격적인 유격체조를 실시한다.

엊그제 전투복 손빨래를 했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런 헛수고를 하지 않았을 거다.

유격체조는 1번부터 16번까지 무작위로 진행되었다.

세 시간 넘게 체조를 진행하다 보니

마치 콩고물을 묻힌 ‘인절미’마냥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토색이 되어버렸다.

‘윽..’

유격체조 8번을 할 때였다.

갑자기 ‘퍽’ 소리가 나더니 바지 쪽이 뜯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유격체조 도중에 바지를 재정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불현듯 오늘 아침에 흰색 속옷을 입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장교대에서는 흰색 삼각 속옷과 사각 트렁크 속옷 두 종류의 속옷을 보급해주는데

나는 원래 삼각을 잘 입지 않는 편이라 한 번도 입지 않았었다.

그런데 유격 때 살이 쓸릴 위험이 있다 해서 오늘 처음으로 흰색 삼각 속옷을 입었었다.

하필이면 흰색 속옷을 입은 날 전투복이 찢어져버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흙탕물을 뒹굴면서 흰 속옷이 영 좋지 않은 색으로 변색했다.

몇몇 동기들은 내가 지린 줄 알았다고 했는데, 모든 걸 걸고 이야기하지만 결코 지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바지 속 속옷을 감추기 위해 자투리 쉬는 시간을 활용해서,

남들 생활관에서 쉴 때 쉬지도 못하고 혼자 고독하게 바느질을 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었다.

꽁꽁 감춘 속옷이 다시 바지 사이로 빼꼼 얼굴을 보이는 데는 3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유격훈련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샌가부터 내 속옷이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조차 않았다.

순간의 창피함보다는 생존이 더 중요했다. 생존은 ‘본능’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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