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더분한 스토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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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을 끝으로 모든 훈련이 끝나고부터 이곳에서의 생활도 나름 지낼 만 해졌다.

이제 더는 손빨래를 하는 일도,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는 일도 없다.

우리에겐 다량의 세탁물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세탁기와 팔팔 끓는 물이 있는 목욕탕이 있으니깐.

게다가 주말에는 IPTV로 아이돌 무대를 모두 돌려 볼 만큼 생활관 내 복지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

이제 우리를 괴롭히던 소대장들도 잘 보이지 않는다.

400명 가까이 되는 전 후보생들의 행정처리를 한꺼번에 진행하느라 정신이 없어 사무실 밖으론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듯하다.

간혹 몇몇 소대장들이 생활관에 오긴 하지만,

그들도 무료하던 차에 놀고 싶어서 오는 거라 긴장할 필요가 없다.

임관할 때가 다 됐는데도 우리를 괴롭힐 정도로 나쁜 사람들은 아니니깐.

오늘 오후에는 드디어 '특기'를 정하는 시간이 계획되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다른 어떤 훈련에 임할 때보다도 더 긴장되었다.

오늘 이 한 번의 선택으로 앞으로의 3년 군생활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긴장이 될 수밖에.

특기 분류에 앞서서 교관들의 간단한 특기 설명 시간이 있었다.

뭔가 알려주려고 하는 것 같긴 한데, 잘 와 닿지는 않았다. 그들도 자신들이 속한 '인사교육' 특기 이외에는 알 방법이 없으니,

자신의 동기들에게 주워 들어온 정도의 얕은 지식으로

후보생들의 호기심을 해소해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원래 내가 관심 있던 특기는 인사교육, 정훈, 그리고 보급 수송 3가지였다.

그중 가장 가고 싶었던 특기는 '정훈 특기였고,

자력 점수가 가장 높아 배정받기 수월했던 특기는 '인사교육' 특기였다.

정훈 특기를 가고 싶었던 이유는

군대에서 그나마 창의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우리 기수 때부터는

'교사 자격증'이 정훈 특기 분류 시 반영이 되지 않게 되면서 갈 수 없게 되었고,

보급 수송 역시 '운전면허 1종 보통' 말고는 가지고 있던 자격증이 없어서 특기를 부여받을 수 없었다.

'인사교육'의 경우 인문계열 후보생들이 배정받기 가장 수월한 특기인 데다가,

'교사 자격증'만 있으면 100% 될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안전한 '보험'과도 같았다.

그러니 내가 인사교육 특기를 받는 건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희망 특기를 제출하기 전 문득 입대 전 만났던 절친한 형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 형은 나보다 딱 1년 먼저 공군 학사장교 훈련을 받아

현재는 수도권에서 복무 중이었고 중국에서 유학했을 당시 나와 동고동락했던 가족 같은 형이기도 하다.

그 형은 ‘정보’ 특기였고, 자신이 정보 특기라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나를 만났을 때도 정보 특기의 장점에 대해 설파했거니와, 며칠 전 내게 보낸 인터넷 편지에도 ‘정보’ 특기 생활이 좋으니 정보 특기로 오란 내용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좋냐고 묻거나 어떤 일을 하냐고 물어보면 ‘그건 알려줄 수 없다.’며 철벽을 치곤 했다.

가족과도 같은 나에게까지 비밀로 하는 게 서운하긴 했지만 모든 정보가 베일에 싸여있다는 신비감에 오히려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 결과, 특기 선정 때 뭔가에 홀린 듯이 1지망에 ‘정보’를 써버렸다.

내 옆에 있던 동기가 나를 보고는

‘뭐해? 미쳤어?’라고 뜯어말렸지만,

뭔가에 단단히 홀렸던 게 분명하다.

애초에 인문계열에서는 세 명밖에 뽑지 않아서 ‘설마 되겠어. 그냥 넣어나 보자’하는 생각이었고,

그 생각은 현실이 되어버렸다.

정보 특기를 받고 나서는 소대 동기들이 ‘왜 그랬어. 힘내.’와 같은 위로의 말들을 건넸고,

한 달 전 응급처치를 과락했을 때가 오버랩되었다.

내가 정보(Intelligence) 특기를 선택했던 건 순전히 ‘정보요원’이 멋있어 보여서였고,

그들이 과연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서였다.

‘정보’ 하면 괜히 뭔가 있어 보이지 않은가? 고작 그런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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