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더분한 스토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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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중반을 지나 어느덧 

20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나의 짧디 짧은 인생에서 

가장  충격을 안겨주었던 일생일대의 경험은 

무엇이었는가.

공군 장교가 되기 위해 겪었던

4개월 간 뼈를 깎는 고통의 장교화 훈련 과정?

소위 임관 후 군대 말단 장교로서 받았던 지대한 스트레스?

두 사건 모두 내 인생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둘 다 아니다.

 인생에서 가장  변화를 주었던 사건은 바로 

초등학교 시절 중국으로의 조기유학이었다.

 

처음 유학을 가게  계기는  다른  아니었다.

 

그 날은 중국 주재원으로 나가 계셨던 아버지의 지인이 잠시 귀국하여 우리 집에 들렀던 날이었다.

그분은 집에서 아들만 둘을 키우고 있었는데,

딸 둘에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던
우리 집을 부러워하곤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딸이 둘이나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딸 한 명 보내주면

몇 년 잘 키워서 돌려보내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아버지에 말을 건넸다.

정말로 지나가듯  말이었는데 

우리 부모님께서  미끼를 '덥석물어버린 것이다.

 

당시 큰 누나는 대입 준비 수험생이었고,

작은 누나는 원체 남의 집에서 살 정도로
비위나 성미가 좋질 못했다.

아저씨는 우리 집에 놀러 온 다음 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고

'단언컨대' 본인이 그런 말을 했었는지 기억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 큰 결심이라도 한 듯이 내 방에 오셔서

 'OO잠깐 앉아봐.' 하고는 

' 아저씨 따라서 중국   가볼래?'라는 

훗날 내 인생의 변환점이 될 그 묵직하고도 짧은 한마디를 건네셨다.

 

그리고 내가 그 무거운 제안에 대한 대답을 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꼬맹이는 '네!' 하고 설렘 가득 찬 어투로 대답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그 무거운 결심에 대해

열한 살 난 꼬마가 과연 뭘 알았겠나 싶다.

그냥 단순하게 해외여행을 하고 싶었고, 비행기를 타보고 싶었던 게지.

 

그렇게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나에게 남은 가장 큰 관문은 '담임선생님' '친구들'에게

'중국으로 갑자기 떠나게 된 일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는지'였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12월 어느 겨울날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 꼬맹이가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선생님, 저 유학 가요!'라고 천진난만하게 이야기했고

선생님은 우리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하고 나서야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셨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얘기해야 할 몫을 고스란히 선생님의 몫으로 넘겨버렸다.

 

유학을 위한 모든 일련의 준비가 끝나고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5년 전인 2005년 1월 21일,

어머니와 나는 인천공항에서 중국 유학행 비행기에 탑승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일주일  귀국하는 일정이었고

 귀국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기약 없는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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